낙락장송
조재훈
본지 제1017호의 ‘보신탕 콩나물국’이란 글을 읽고 여러 분들이 전화를 주셨다. 역시 어렵던 때의 추억은 출신 학교나 지역에 관계없이 공감을 만드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맹학교 시절에 대한 기억을 몇 가지 더 떠올려 보기로 했다.
전에는 서울맹학교가 농아학교와 병합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시절의 선배들은 농아생들과의 이색적인 경험이 많았다. 밖에서 길을 헤매다가 농아생을 만나 소리없는 안내를 받던 일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불쾌한 사건들이 더 잦았다. 걸핏하면 치고 도망을 가거나 땔감이나 먹을거리를 채갔다. 또 새 신발이나 모자도 도난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가 1959년 6,800평이나 되는 땅을 각각 배분하여 분리하게 되었다. 그런데 학부형의 세가 약한 맹학교가 암반의 경사지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따라서 새 학교에는 계단이 많았고 수도관을 설치하지 못해 물이 귀했다. 본관 앞에 샘이 있었으나 양이 적어 여 기숙사 앞에 우물을 팠지만 그것도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학생들은 정문 밖 큰 우물로 생활용수를 길러 다녔다. “주의, 주의, 물, 물...”하고 경계신호를 하지만 서로 부딪혀 물세례를 자주 받았다.
그런데 학생들에게는 더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당장 공부하는데 필요한 교과서와 학용품 문제였다. 그때는 아연판에 점자를 새겨 인쇄했다. 16절지 두 배 되는 아연판을 반으로 접어 점자인쇄기로 찍은 다음 그 사이에 종이를 넣고 고무 롤러에 돌려서 한 장씩 빼냈다. 그리고 인쇄된 종이는 학생들 각자가 실로 꿰어 책으로 매야 했다. 이 작업에는 상급생들이 많이 동원되었다. 하지만 점자지가 귀하였다. 그래서 달력 종이나 미군부대에서 홍보지로 나오는 ‘자유벗’이란 잡지가 재활용되었다. 그러다보니 거기에 사진이 인쇄되었던 유명인사의 눈에까지도 점자가 찍혔다. 그렇지만 이것도 부족하였다. 그래서 점자를 찍었던 종이를 물에 적시어 판판하게 누른 다음 말려서 재활용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 재생지를 다리미로 다려 가며 여러 차례 활용하였다.
그런데 1964년 최윤중(고등부 1회)은 그 귀한 점자지를 300장씩이나 상으로 받았다. 이것은 티 하나 없는 백지였다. 교지 창간호를 내는데 그 표지 제목에 응모하여 당선된 상품이었다.
서울맹학교 터는 대궐 식구들이 살던 궁이 있던 자리였다. 그래서 품위있는 나무들이 있었다. 그 나무들 가운데에는 껍질이 흰 백송도 있었다. 이 소나무는 경제적 가치로는 별것이 아니지만 희소성과 품위로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이 백송이란 이름이 교지 창간호의 이름으로 뽑히게 된 것이다. 그 뒤 백송은 교목으로 선정되었다. 나라에는 국기가 있고 국화도 있으며 국목도 있다. 그리고 학교에도 그 상징물로 교기와 교화에 교목도 대개 정해져 있다. 그런데 서울맹학교는 백송을 교목으로 정한 것이다. 그리고 동창회 이름도 백송회가 되었다. 100년이 넘는 역사가 적지는 않지만 졸업생 수에 비하여 일반 학교보다 많은 인물들이 낙락장송으로 길러졌다. 백설이 만건곤할 때 독야청청하는 봉래산 제일봉의 낙락장송들이 된 것이다.
미국 이민 100년이 넘었어도, 한국인이 오른 공직은 차관보가 최고였다. 그런데 그 최고 벼슬 중에 우리 동문이 있었다. 그리고 시각장애인 하버드대학교 출신으로서 최초의 주식 평가사가 되어 현재까지 활동 중인 인물도 서울맹학교 출신이다. 백송 아니 낙락장송의 품격이 모든 졸업생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요즘 연예인들 가운데는 성대모사나 모창으로 인기를 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성대모사는 맹학생이 원조라고 할 만큼 역사가 깊다. 어찌나 선생님 목소리 흉내를 잘 내는지 수업을 하러 오셨던 시각장애인 선생님이 복도에서 발길을 돌리신 경우도 있었다. 어떤 때는 몇몇이 각자 다른 선생님의 목소리를 내어 교직원회의를 열기도 하였다. 이것은 영락없는 교무실이 되었다.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선생님이 불같이 화를 내시며 들이닥쳐 벌을 내리지만 소용없었다. 학생들은 벌을 받을 때의 그 장면을 재생했다고 할 만큼 또 흉내를 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다른 학교 출신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이러한 일들은 정도를 달리할 뿐 어디에서나 있었던 것 같다. 지방 맹학교는 교재와 학용품은 물론 모든 물자가 더 부족하였으니까. 그리고 맹학생들의 특성이나 기질도 비슷하였기 때문이다.
보통 일생의 1/6 혹은 1/4이나 되는 긴 세월을 한 지붕 한 솥 밥을 먹으며 생활하던 맹학교가 아닌가? 그래서 그 동문들의 유대가 더욱 돈독한 것 같다. 그리고 선생님들에 대한 정도 남다른 것 같다. ‘교사는 있어도 스승은 없고, 학생은 있어도 제자는 없다’는 시대가 되었지만 맹학교 동문들은 해마다 스승님을 모시고 사은회를 갖는 데가 많다. 또 동문들 간에 경조사를 챙기는 것은 물론 어려운 형편에 처한 이를 돕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쪼록 이러한 아름다운 전통이 시각장애인계에서만이라도 영구히 보전되어 가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2019. 7. 15. 제1029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