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의 한 살이
이진규(임대업)
내 고향 강원도 산촌의 여름은 단연코 옥수수들이 들판을 판치는 계절이었다. 그놈들은 마당이고, 들이고, 산자락이고 어디든 노는 땅을 그냥 두지 않았다. 기나긴 잎날개를 흔들어 사그락사그락 춤판을 벌이는 옥수수들의 여름 축제에서 덩달아 신나는 건 나였다. 뻐꾸기 소리가 산허리를 휘돌아온 지 두 달쯤 지나고부터 시작되는 옥수수들의 키 재기 게임에는 아직 열 살 미만이던 나도 끼어 있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곧장 뒤꼍 울 너머 텃밭으로 쪼르르 달려가 요것들이 밤새 나보다 얼마나 컸을까 하여 내 키와 대어보며 성급하게 절기를 재촉하던 동심이 있다. 초복을 지날 즈음부터 그놈들은 내 키를 훌쩍 추월했고 그날부터 나는 그놈들의 키를 한 번도 따라잡아 본 적이 없었다.
옥수수는 대궁과 송이로 서로 엮인 형국이 마치 엄마가 아가를 업은 듯한 모습이어서 내겐 무척 흥미로운 대상의 작물이었다. 그쯤 자란 옥수수 대궁들은 등과 허리쯤에 아가들을 둘러업고 제법 엄마 같은 행색으로 바람 따라 둥개둥개 어르는 사이에 여름은 한물 더 깊어지고, 단물 담뿍한 찐 옥수수로 다디단 하모니카를 불던 때도 언제나 여름의 한가운데였다. 그래서일까 내 생애에서 옥수수들과 함께 자라던 한때를 나는 내 최고의 황금기로 추억한다.
한여름의 대궁엄마들은 아가 보살핌으로 눈코 뜰 새 없다. 낮에는 샘물 퍼 올려 햇살 타서 단물 먹이고, 밤에는 별빛으로 천을 짜서 겹겹이 옷 짜 입히기에 하루가 짧다. 게다가 매미소리 모아선 수염 고깔모자도 떠 씌워야 했으니, 대궁엄마들의 삼복고개 넘기는 우리네 어머니들처럼 늘 고되고 힘겨웠다. 그러나 제 아가 보호본능은 실로 감동스러울 만큼 지극정성이다. 옷을 짜 입혀도 홑겹은 불안하여 세 겹 네 겹 감고 또 감았다. 그마저 마음 안 놓여 누구 눈에 띌까 얼굴 탈까 수염으로 잎으로 꽁꽁 또 가리고야 안심하던 대궁엄마들의 종자 사랑은 그대로 모성의 표상이 아닌가 싶다.
옥수수들은 여름의 방랑자였나. 그 호된 더위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아가들의 미래가 기다리는 가을로 간다. 육아여행은 하루같이 고된 전쟁터, 햇볕의 매서운 찜질을 참고, 천둥번개에 식겁하고, 사나운 폭풍우를 견디고, 까마귀들의 흉험한 눈길에 오싹댐을 참아내면서도 가을로 가는 여행은 삶의 궤도였으므로 멈출 수 없다. 그래도 아가들이 탱글탱글 여무는 가을은 언제나 벅찬 미래였으리라.
가을 들녘은 온통 저마다 제 아가 자랑으로 들썩일 만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이제 곧 떠나보낼 아가들의 건승을 비는 산신제라도 드리는 걸까? 외려 사위를 정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앞산을 향해 줄지어 고개 숙인 대궁엄마들의 몸짓이 왠지 자못 진중하고 숙연했다. 정 뗄 날을 앞둔 들녘이 온통 슬픔처럼 무거웠다. 당연지사였다. 아무리 식물에 불과한 생물일망정 삼복고개를 업고 넘은 정마저 어찌 쉬이 놓겠는가. 옥수수 대궁에서 송이를 잡아챌 때 ‘뿌욱’하고 나던 소리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엄마 품을 떠나는 아가의 비명으로 상상되던 그 소리는 내 동심으로부터 여태껏 따라 다닐 만큼 울림의 여운이 길다.
옥수수 대궁에는 거의 두 송이의 옥수수가 달리곤 했는데, 젖줄의 초입인 아래쪽에 자리한 놈은 오동통 푸짐하고 탄실했으나, 대궁의 위쪽에 열린 놈은 젖줄이 멀어서인지 반생반사의 미숙아처럼 늘 빈약했다. 알갱이조차 틔우지 못한 쭉정이 수준이어서 돼지 먹이로나 쓰이기 일쑤였는데, 동물이건 식물이건 제 종자를 아끼고 지키라는 명령어를 유전인자가 이미 전하고 있거늘, 옥수수 대궁엄마들은 무슨 연유로 못난이 자식 하나를 덤으로 키웠을까라는 의문을 나는 못내 지울 수 없었다. 수시로 옥수수 낱알을 노리는 까마귀로부터 진짜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벌의 가짜가 필요했을 고도의 속임수는 혹 아닐까하여 과연 진실이 뭐냐고 옥시기 어미한테 문의해 봤지만, 하늘과 대지만 아는 극비라면서 여태 대답이 없는 탓에 나는 강냉이밭에 뒹구는 돌멩이보다 무식한 처지다.
그렇다. 옥수수에는 어서 여물기를 고대하던 풋풋한 유년이 있고, 내 동심의 서정이 녹아 있어 언제 어디서 마주해도 그 반가움이 예사롭지 않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한때 한 고향 한 마당에서 서로에게 키를 대어보며 자라던 끈적한 추억을 공유한 사이가 아니던가.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는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나의 아름다운 순간들도 저 산 너머 고향에 머물며 오늘도 나를 부른다.
옥수수는 대궁과 송이로 서로 엮인 형국이 마치 엄마가 아가를 업은 듯한 모습이어서 내겐 무척 흥미로운 대상의 작물이었다. 그쯤 자란 옥수수 대궁들은 등과 허리쯤에 아가들을 둘러업고 제법 엄마 같은 행색으로 바람 따라 둥개둥개 어르는 사이에 여름은 한물 더 깊어지고, 단물 담뿍한 찐 옥수수로 다디단 하모니카를 불던 때도 언제나 여름의 한가운데였다. 그래서일까 내 생애에서 옥수수들과 함께 자라던 한때를 나는 내 최고의 황금기로 추억한다.
한여름의 대궁엄마들은 아가 보살핌으로 눈코 뜰 새 없다. 낮에는 샘물 퍼 올려 햇살 타서 단물 먹이고, 밤에는 별빛으로 천을 짜서 겹겹이 옷 짜 입히기에 하루가 짧다. 게다가 매미소리 모아선 수염 고깔모자도 떠 씌워야 했으니, 대궁엄마들의 삼복고개 넘기는 우리네 어머니들처럼 늘 고되고 힘겨웠다. 그러나 제 아가 보호본능은 실로 감동스러울 만큼 지극정성이다. 옷을 짜 입혀도 홑겹은 불안하여 세 겹 네 겹 감고 또 감았다. 그마저 마음 안 놓여 누구 눈에 띌까 얼굴 탈까 수염으로 잎으로 꽁꽁 또 가리고야 안심하던 대궁엄마들의 종자 사랑은 그대로 모성의 표상이 아닌가 싶다.
옥수수들은 여름의 방랑자였나. 그 호된 더위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아가들의 미래가 기다리는 가을로 간다. 육아여행은 하루같이 고된 전쟁터, 햇볕의 매서운 찜질을 참고, 천둥번개에 식겁하고, 사나운 폭풍우를 견디고, 까마귀들의 흉험한 눈길에 오싹댐을 참아내면서도 가을로 가는 여행은 삶의 궤도였으므로 멈출 수 없다. 그래도 아가들이 탱글탱글 여무는 가을은 언제나 벅찬 미래였으리라.
가을 들녘은 온통 저마다 제 아가 자랑으로 들썩일 만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이제 곧 떠나보낼 아가들의 건승을 비는 산신제라도 드리는 걸까? 외려 사위를 정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앞산을 향해 줄지어 고개 숙인 대궁엄마들의 몸짓이 왠지 자못 진중하고 숙연했다. 정 뗄 날을 앞둔 들녘이 온통 슬픔처럼 무거웠다. 당연지사였다. 아무리 식물에 불과한 생물일망정 삼복고개를 업고 넘은 정마저 어찌 쉬이 놓겠는가. 옥수수 대궁에서 송이를 잡아챌 때 ‘뿌욱’하고 나던 소리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엄마 품을 떠나는 아가의 비명으로 상상되던 그 소리는 내 동심으로부터 여태껏 따라 다닐 만큼 울림의 여운이 길다.
옥수수 대궁에는 거의 두 송이의 옥수수가 달리곤 했는데, 젖줄의 초입인 아래쪽에 자리한 놈은 오동통 푸짐하고 탄실했으나, 대궁의 위쪽에 열린 놈은 젖줄이 멀어서인지 반생반사의 미숙아처럼 늘 빈약했다. 알갱이조차 틔우지 못한 쭉정이 수준이어서 돼지 먹이로나 쓰이기 일쑤였는데, 동물이건 식물이건 제 종자를 아끼고 지키라는 명령어를 유전인자가 이미 전하고 있거늘, 옥수수 대궁엄마들은 무슨 연유로 못난이 자식 하나를 덤으로 키웠을까라는 의문을 나는 못내 지울 수 없었다. 수시로 옥수수 낱알을 노리는 까마귀로부터 진짜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벌의 가짜가 필요했을 고도의 속임수는 혹 아닐까하여 과연 진실이 뭐냐고 옥시기 어미한테 문의해 봤지만, 하늘과 대지만 아는 극비라면서 여태 대답이 없는 탓에 나는 강냉이밭에 뒹구는 돌멩이보다 무식한 처지다.
그렇다. 옥수수에는 어서 여물기를 고대하던 풋풋한 유년이 있고, 내 동심의 서정이 녹아 있어 언제 어디서 마주해도 그 반가움이 예사롭지 않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한때 한 고향 한 마당에서 서로에게 키를 대어보며 자라던 끈적한 추억을 공유한 사이가 아니던가.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는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나의 아름다운 순간들도 저 산 너머 고향에 머물며 오늘도 나를 부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