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산다는 건 선택 받은 축복
천병은(소설 작가)
지난 해 8월, 큰딸 새롬과 함께 결혼을 앞둔 녀석의 남친이 몬 차에 몸을 싣고 파주 제일묘지 추모의 숲으로 달렸다. 시간은 밤 여덟시를 넘었고 이미 추모의 숲을 왕래하는 대중교통은 끊어진 뒤였다. 시내에서 쇼핑을 하고 저녁도 먹고 하자기에 따라 나선 것인데, 갑작스레 끄집어낸 딸의 제의에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러자고 답했다. 결혼을 앞두고 나니 뭉클 엄마 생각이 났나 보다 생각하며 짠한 마음으로 흔쾌히 응했다.
어둠이 두툼하게 내려 덮인 용미리 추모의 숲은 시간에 떠밀려 찾는 이들의 걸음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고즈넉한 침묵에 둘러싸인 그곳에서 풀벌레들이 나름 높낮이 음의 합창곡으로 우리 일행을 반겨 맞이했다. 바람도 벌써 잠자리에 들었는지 습도 높은 공기만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헌화대와 분향대에는 하루 동안 다녀간 산 자들의 마음이 꽃 묶음과 향, 담배, 술잔 그리고 망자를 그리는 글귀들로 남아 있었다. 느닷없이 찾은 걸음이었던지라 꽃 묶음 하나 사 들고 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남편이 그리고 큰딸이 밤길을 달려 찾아온 것만으로도 기뻐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자위했다.
수도 헤아릴 길 없는 망자들의 분골이 뿌려진 드넓은 산비탈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그리고 잔디가 여전히 주인처럼 눌러 앉아 있었다. 녹음이 짙게 물오른 잔디들은 그리고 꽃들은, 오랜 시간 뿌려져 쌓인 분골에다 뿌리를 내리박고 서서 망자를 대신해 찾는 이들에게 반갑게 손을 내밀어 왔다. 딸의 눈으로 내려다 본 속세의 불빛들은 그렇게 화려할 수가 없었다. 그 화려함들에서는 또 어떠한 삶이 그 시간 전개되어지고 있을지, 그리고 나 또한 그 불빛 속으로 어쩔 수 없이 스며들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며 나이답지 않게 인생무상을 느꼈다.
얼굴에 와 닿는 차가운 느낌과 들려오는 우렁찬 소리에 잠에서 빠져 나오고 보니 요란스럽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추모의 숲을 내려와 전망 좋은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귀가해 씻은 뒤 시원한 기분에 베란다에 누웠는데 잠이 들었던가 보다. 시간은 새벽 두 시를 넘어서고 있었고, 얼굴에 와 닿는 빗방울의 차가운 감촉이 그렇게나 좋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누웠다가 커피를 타 가지고 다시 베란다에 나와 앉아 생각과 생각의 그네타기를 하고 있자니, 한 마리 두 마리 새들이 기지개를 켜고 매미들도 덩달아 목청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는 변함없이 순환되어지고 산 자들은 나름나름 바쁜 걸음으로 주어진 숙제에 몰두하고 있으며, 그렇게 세상은 오늘에서 내일로 꾸준히 이어져 가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는 움켜잡은 나의 것이다. 즉 내 것임과 동시에 여러분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삶이라는 것이 마냥 즐거울 수만 있을까. 혹여 즐겁지 않은 일이 있다손 치더라도 내일은 그렇지 않겠지 자위하며 그리고 기대하며 그렇게 오늘을 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숨이 가쁠 정도로 바쁘고 힘든 시간 속을 달음질치더라도 가끔은 아주 가끔씩은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바라봤음 싶다. 그리고 주변도 두리번거리는 아주 쬐끔한 여유만이라도 가져봤음 싶다. 거기 우리 눈길이 닿는 그곳에 우리보다 열악한 환경을 지니고도 태연자약한 얼굴을 하고 웃음짓는 우리의 이웃이 있음을 확인하고 삶에다 내딛는 걸음에 힘을 가할 수 있기를 청해 본다.
오늘은 산 자들의 것이다. 바로 오늘을 하루 앞두고 어제 세상을 떠난 이가 부지기수로 많다. 그들은 내일을 살고 싶었으나 그걸 목전에 두고 세상을 떠나갔다. 그들이 그렇게나 살고 싶어 하던 내일을 우린 자연스럽게 누리고 있다. 모두 다 제쳐 두고 그저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린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건 곧 내게 주어진 오늘을 그저 의미 없이 허비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