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서경애(주부)
또르륵 통장정리가 시작된다. 조금 후에 엉덩이를 쏙 내밀면서 나온다. 받아 들고 살펴보는데 3자에 동그라미 여러 개가 붙은 글씨가 보인다.
‘이게 뭐야? 수도세, 전기세가 빠져나갔나? 이런 것들은 초입에 나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다시보자. 하나, 둘, 셋… 동그라미가 8개 아냐? 그럼 삼천만 원!’
가슴이 죄를 지은 사람처럼 따다닥 거린다. 손이 벌벌 떨리면서 눈이 쉴 새 없이 깜박거린다. 바위덩이가 달려와 덮치는 것 같이 캄캄해진다. 머리가 빙그르르 하더니 긴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사모님,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세요?”
친절한 은행 직원이 묻는다.
“내 돈을 누구한테 빼주었어요?”하며 그 아가씨 유니폼 블라우스를 잡아당긴다.
“사모님! 왜 그러세요? 누가 돈을 가져갔다고 그러세요? 정신차리세요!”
“통장 좀 봐! 삼천만 원 빼줬잖아!”
소리소리지른다. 은행 안은 엉망진창이 된다. 나이 지긋한 분이 점잖은 소리로 차근차근 묻는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 분은,
“이것은 고객님이 찾아가신 건데요. 뭐가 잘못되었나요?”
“아니, 내가 언제 찾아가요? 이 돈은 집 지은 거 잔금 치를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내가 왜 찾아가요? 이건 틀림없이 저 아가씨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준거에요. 누구한테 주었나 CCTV 확인해 봐요!”
곧이어 경찰이 온다. 얘기를 들은 경찰은 시간이 걸리니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한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 비밀번호까지 아는 그 직원의 잘못이라고 굴뚝같이 믿는다.
갖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일주일을 기다렸다. 연락이 왔다. 경찰서로 오란다. 이제 내 돈을 찾겠구나 하는 설렘으로 갔다.
들어서자마자 오빠 친구가 말을 건넨다.
“동상! 여기 웬일이여?”
“아니, 오빠는?”
“글씨 몰러. 오라고 하네. 아무 죄도 안 지었는디. 술 먹은 죄밖에는 없는 것 같은디. 별일이야. 이 나이 되도록 경찰서는 처음이여.”
“근데 아저씨는?”
오빠의 아버지도 와계신다.
“그것도 몰러. 같이 오랴.”
우둥퉁한 경찰이 큰소리로, “아줌마! 이리와 앉아봐요.”
나란히 앉는다. 테이프를 돌리던 경찰이 긴 막대기로 “이 여자 누구인지 알겠어요?” 한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다. 경찰은 남편에게 묻는다.
“사장님은 알겠어요?”
영 기분 나쁜 얼굴로 남편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이 여편네! 바로 당신이잖아!”
단추 구멍만한 눈으로 다시 보니 영락없이 꽃무늬 치마에 노란머리. 다시 봐도 나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경찰아저씨 내가 왜 저기에 있어요?”
“아줌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아줌마가 알지.”
하며 남편에게 한마디 한다.
“사장님, 밤에만 사랑하지 마시고 낮에도 사모님 좀 사랑해 주세요. 아무리 바빠도 사모님 병원 좀 꼭 데리고 가시고요.”
빈정거리는 투다.
“내가 못살아. 저 여편네 때문에 원 창피해서.”
휙 나가버린다. 오빠 친구는 손을 잡으며 “동상, 어쩌다 이렇게 됐댜? 예쁘고 얌전한 것이….” 쯧쯧 거린다.
“그런데 경찰 선상님. 우리 부자는 왜 오라고 한거유?”
“아직도 이 상황을 모르시겠어요? 그러니까 이 아줌마가 삼천만 원 잊어 버렸다고 신고를 했잖아요. 수표 추적 하다 보니 선생들한테까지 가게 된 거에요. 나머지는 이 아주머니한테 물어요. 간밤에 어수선 하더니 오늘 하루 공치네. 아줌마 두 분한테 사과하시고 돌아가세요. 그리고 아줌마도 동생 같아서 얘기하는데 병원 가 봐요. 지금은 조기 치매도 많다니까.”
졸지에 치매 환자가 되어 두 사람에게 사죄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훔치며 서를 나온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어진다. 그런 와중에 오빠 친구는,
“동상 나는 동상한데 이자 없이 돈 빌려준 죄 밖에 없는데 어쩌자고 우리를 경찰서에서 부르게 한댜?”
“오빠, 아저씨. 죄송해요. 집 짓는 문제로 너무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정말 깜박했어요.”
“동상이 보름 전에 돈 갚았잖여. 그게 생각이 안 난단말여? 우리는 깜짝 놀랐잖여. 늘그막에 평생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오다니. 아휴. 십년감수 했잖여. 동생 어이가. 그리고 한약방에 좀 가벼.”
망신망신 개망신 당하고 은행으로 간다. 여직원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었다.
“사모님 때문에 잠깐이기는 해도 도둑 된 것 같아 정말 속상했어요.” 한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하고 집으로 온다. 남편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아휴, 저 정신머리.” 하더니 문을 탁 닫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