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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보리밭처럼 파란 유년의 추억(정철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5-01 오후 1:38:25

조회수 3474

게시물 내용
제목 보리밭처럼 파란 유년의 추억(정철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5-01 오후 1:38:25 (조회 : 3474)

보리밭처럼 파란 유년의 추억
정철우(대전대학교보건대학원 객원교수)

  보리밭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요즘이다.
  보리가 주식이었고 주경작물이었던 사오십년 전 우리 농촌은 들녘이 보리밭으로 꽉 찼었다.
  보리는 다른 작물에 비해서 우리와 가까이한 친근한 농작물이며, 무척 애착이 가는 식량이자 우리의 애환을 깊이 간직한 향수어린 식량이다.
  옛말에 ‘오뉴월 보릿고개’란 말이 까마득히 잊혀져가는 요즘이지만 어른들의 기억 속엔 보리가 되살리는 아늑한 옛날의 추억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보리는 그 발아에서 생육 기간이 엄동설한의 한 겨울을 이겨내고 자라는 특이한 작물이며, 추운 눈보라 속에서 꿋꿋이 자라 결코 한파에 시들지 않는 강인한 소생력으로 타 작물과 크게 비교되는 게 보리의 특성이기도 하다.
  찬바람과 살얼음을 뚫고 바늘같이 생긴 싹을 내밀어 봄을 땅속에서 이끌어 올리는, 작지만 다부진 보리의 생육이 보리를 주식으로 했던 우리 민족의 강인함을 키워주지 않았나 싶다.
  오월의 보리밭은 마치 캔버스에 담긴 진한 녹색의 수채화처럼 활기가 솟구치는 역동적인 힘을 보는 듯 건강스럽기까지 하다.
  봄바람에 쏠리어 적당한 각도를 유지하며 옆으로 쏠리듯 눕다가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서는 보리밭의 봄바람은 시골 보리밭 풍경 가운데 눈에 띄는 봄 풍경의 대표적 모습일 게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갈 즈음엔 보리밭 근처에서 제법 고소한 보리 냄새를 맡을 수 있음도 유월의 한가로움이며, 종달새 떼 지어 보리밭에 알을 낳는 시기가 바로 보리 익는 그런 계절이다.
  요즘엔 보리밭 구경보다는 비닐하우스나 꽃을 재배하는 농가가 대부분이어서 사실 보리밭 구경이 쉽지만도 않은 상태이나 어렸을 적 보리밭 사이를 걷던 추억은 대단했었다.
  키보다 더 자란 보리밭 이랑 사이에서 보리피리 불면서 해가는 줄 모르고 깜부기 장난으로 얼굴이 온통 검게 분칠된 검둥이 놀이 또한 그 향긋한 보리밭에서 벌어지는 유년시절의 추억이었다.
  보리밭이 점점 없어져가고 우리 의식에서 멀어져가는 오늘날이지만 마음속에 떠오르는 그 서정은 비단 나만의 추억은 아닐 듯싶다.
  보리밭을 거닐면 왠지 마음이 가난해짐을 느낄 수 있다.
  지지리도 못살고 배고팠던 해방 이전의 춘궁기나 보릿고개 기억에서 우선 배고픔의 단 한 가지 해결법이 보리였고, 그 가난했던 마음의 결식 또한 순수한 인간적 밑바닥을 감추지 않았던 자연스러움이 아니었을까 한다.
  왠지 보리밭가에 서면 약간은 울적해지는 건 웬일일까? 나에겐 보리밭의 추억이 그런 울적한 분위기에 더욱 가까운지 모르겠다.
  그것은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를 읽고 난 다음부터 보리밭과 문둥이의 그 애절한 울음까지를 마치 내 자신의 언어나 내가 토해낸 심금을 울리는 인간애로 환치하여 작가의 위치에 나를 대입시켜버린 그런 처사에서 비롯된 하나의 동일시 과정이 아니었을까 한다.
  비록 내가 문둥이가 아닐지라도 문둥이가 앓고 있는 그 이상의 열병 같은 그 무엇이 내게 내재되어 있었을 법하고 그것을 「보리피리」에 슬쩍 붙여 실어 마치 내가 그 시를 쓴 듯한 착각과 대치와 감동을 챙겼던 것 같다.
  농촌에서 비오는 날이면 농사일을 할 수 없이 집안에서 쉬게 되는데 이때 마을 집집마다 보리 볶는 냄새가 동네를 꽉 차게 뒤엎어 아이들의 호주머니엔 붉은 보리와 콩이 가득 들어있기 마련이었다.
  요즘 말하는 피자나 핫도그에 아이스크림 같은 군것질인 셈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바람골이 마치 바다의 파도가 밀려가는 보리밭의 바람풍경을 어디서 다시 찾을 내 유년시절의 그 푸르디 푸른 녹원이며 질펀한 꿈의 도화지일지 크게 아쉽다.
  이제 보리가 노릇노릇 익어가는 계절 앞에서 종달새가 보고 싶고 보리밭 이랑 길을 오르내리시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보고 싶고 깜부기로 검둥이가 되어 배꼽을 잡았던 뿔뿔이 흩어진 개구쟁이들이 보고 싶으며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던 보리피리 소리가 듣고 싶다.
  왠지 가난해지고 숙연해져서 성당이나 법당에 들어선 기분이 되는 보리밭을 거닐면서 그 유년 시절의 꾸밈새 없이 천진스러웠던 추억하나가 몹시 욕심이 나지만 이렇게 가름한 눈을 들어 하늘을 보는 나의 심정이 하늘처럼 파랗지 못함은 속세에 찌든 삶의 파편과 찌꺼기가 뒤엉킨 불투명 때문일 게다.
  오늘도 보리밭을 찾아 난 떠날 것이다.
  그 유년의 진녹색 추억과 꿈이 지금도 덩그러니 앉아있을 보리밭 그 어디를 찾아 문둥이가 흘렸던 그런 가난하고 진실한 나를 그리워하면서 보리밭을 찾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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