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고의 세월 견뎌내고 고수가 되기까지
조경곤(고수)
나는 어릴 때부터 판소리를 하시던 큰아버지, 아버지를 보며 국악문화권에서 성장했다. 6살 꼬마시절 무렵부터 손님으로 온 명창들이 소리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소리하는 주변에 서서 감상을 하며 감동을 받곤 했었다. 그러는 사이 내 마음속에 우리 가락에 대한 정서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평소 말없는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청소년기의 나는 운동을 좋아했다. 합기도, 호신술을 익히며 활발하고 적극적인 행동으로 친구들을 리드하며 야인의 삶을 즐겁게 누리고 있을 즈음, 격투 끝에 눈을 맞는 사고가 일어났다. 몇 번의 수술 후유증으로 녹내장을 앓으며 결국 실명에 이르렀다. 나에게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시각장애인이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다. 20대 후반에 실명을 해 지금은 빛을 분간하는 정도이다.
이후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장애인 선교회에서 한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신학을 공부하는 중이었는데 가끔씩 안내를 받기 위해 만남이 이어졌고 신앙적 가치관이 같은 동시에 순수한 마음씨에 끌려 3년의 교제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결혼 초 거의 시력을 상실하여 학업은 중단하게 되었고, 아내의 내조를 받으며 교회에서 장구 반주를 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북장단 공부를 다시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최고의 북 장단 고수 김청만 선생님의 사사를 받으며 명고의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매년 전국대회가 열리는데, 눈이 안보이면 명창의 입이 보이지 않아 북장단을 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판소리를 하는 창자의 입이 먼저 열리고 소리가 나오기 때문에 창자의 입모양, 호흡, 동작을 잘 살펴보고 들으며 북 반주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창자와 고수는 마치 한 몸처럼, 실과 바늘처럼 서로의 눈빛과 정서를 주고받으며 멋진 소리의 무대를 연출해야 하지만 나는 다만 온 감각에 의지하여 북 반주를 해야 한다.
손에서 피가 나고 딱지가 굳고 하기를 여러 번이었다. 여름이면 이마에서 흐르던 땀방울이 바닥에 떨어지기를 여러날 반복했다. 때로는 7시간 이상 한 자리에 앉아 녹음테이프를 틀어놓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곤 했다.
그 결과, 전국 고수대회에서 신인상을 시작으로 3번의 명고부 입상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참가자는 모두가 비장애인이었고 시각장애인은 나 혼자였다. 그들과 당당히 겨뤄 일궈낸 결과였다.
이후 계속 정진하여 개인 고법 발표를 세 번 하게 되었다. 기존 국악인들에게도 개인 발표회를 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국악인이라고 해서 누구나 발표를 다 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지켜봐 주는 주위 사람들의 격려와 무엇보다 내 가족의 든든한 믿음, 희망의 미래를 져버릴 수 없었던 나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지난 모든 좌절, 고난의 세월을 뒤로 하고 나는 오늘도 시각장애인 고수 조경곤의 이름을 세계로 뻗기 위해 고전분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