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유동원(침사)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일반인들의 유일한 연락수단이었던 편지가 지금은 여러 가지의 통신 발달로 내용도 의미도 많이 퇴색되었다.
어떻든 편지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애환을 전해 주던 통신수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편지는 내 개인적으로도 삶에 있어서 좋은 소식을 전해 주던 기다림의 하나였다.
나는 충청도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다섯 살이 되던 1951년 2월 어느 날,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쟁의 참극 속 피난살이를 끝내고 고향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홍역으로 실명했다.
그렇게 철모르는 채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어갔지만, 언제까지나 부모님의 슬하에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열두 살이던 어느 날 학교에 가라는 부모님의 권유를 받고 주어진 운명이라 체념하고 고향의 모든 것과 작별하게 되었다.
지금도 거의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육 기관이 각 도마다 하나씩 있었기 때문에 시골 출신인 나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달래며, 1958년 8월 25일 작은 가슴에 막연한 꿈을 안고 낯선 춘천으로 떠났다.
하늘은 축복을 하는지, 집을 떠나는 나의 안타까움에 같이 울어 주는지 새벽부터 주룩주룩 늦여름 비가 내렸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도록 펑펑 쏟아지는 눈물은 삼킬 수도 없고 닦을 수도 없이 흐르는데, 완행버스는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비포장도로를 따라 원주를 지나 횡성-홍천을 거쳐 일곱 시간 만에 목적지인 춘천에 도착했다.
지금은 천 리 타향이란 말이 실감 안 나지만, 그 당시 남의 손에 이끌려온 나로서는 고향으로 향하는 길이, 가고 싶어도 혼자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천 리보다도 만 리보다도 멀게 느껴졌다.
지금은 전화나 휴대폰, 이메일, 팩스 같은 연락수단이 다양하지만 그 당시에는 관공서나 큰 기업체 같은 곳에나 수동식 전화가 있을 뿐 서민들의 연락 수단은 오직 편지뿐이었다.
나는 다행히도 기숙사 생활에나 학교생활에 쉽게 적응되어 갔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가족들도 보고 싶고, 아랫집 윗집 친구들도 궁금하고, 용돈도 필요해졌다.
그렇지만 시각장애인인 내가 한글을 마음대로 쓸 수 없으니 편지도 쉽게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벼르고 별러서 학교 소사에게 대필을 부탁하여 고향집으로 편지를 보내곤 했다.
편지는 가는데 4~5일, 오는데 4~5일이 걸리니 편지 한 통을 보내면 최소한 10여 일이 지나야만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편지를 보내고 10여 일이 지난 후부터는 “아무개 편지다”라는 선생님의 호명을 ‘눈이 빠져라’가 아닌 ‘귀가 빠져라’ 하고 기다렸다.
편지가 학교로 오면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편지를 받은 학생들을 호명하며 나누어 주었다. 그 때마다 행여 내 이름이 불러지지 않을까 귀를 쫑긋하며 기다렸고, 드디어 내 이름이 불리고 편지를 받게 되면, 얼마나 반갑고 기쁜지 부모형제를 만난 듯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객지에서 홀로서기에 힘들어 하던 나에게 고향의 편지 한 통은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그 누가 말하기를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다.
어언 50여 년이 지난 요즈음 모든 게 어렵고 힘든 이때에 그 옛날 편지를 받고 기뻐하던 그런 순간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