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설날 풍속도
이진규 (임대업)
“오늘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단다. 그러면 커서 장가도 못 가. 그러니까 오늘밤엔 세상없어도 잠을 자면 안 돼!”
음력 섣달 그믐날밤이면 어른들로부터 어김없이 듣던 소리다.
싹둑싹둑 가래떡을 써는 소리를 들으며 밤을 밝히던 그날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그때를 꿈꾸고 있을까?
섣달 그믐날밤. 이 ‘해지킴이’라는 풍습은, 혹시 집안에 있을 지도 모를 잡귀를 내쫓고 신성하게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작은 의식이다.
가족 모두가 잠을 자지 않기 위해서 윷놀이도 하고, 옛날 얘기도 듣고 그러다 졸음을 못 이겨 곯아떨어지는 동생이 있으면 분가루나 밀가루를 눈썹에다 살짝 칠해놓고는 흔들어 깨운 뒤에 거울을 들이밀면서 "너, 큰일 났다. 장가 못가면 어쩌냐!" 하는 말로 동생을 엉엉 울게 만들기도 하던 설날이다.
머리맡엔 고운 설빔 있겠다, 날이 밝으면 이것저것 맛있는 것도 먹고 세뱃돈도 타는 설날이겠다, 이래저래 들뜬 마음으로 온밤을 꼬박 새우는 까치 까치설날이 지나가면 우리의 즐거운 설날이었지. 조상님들의 은덕을 기리면서 정성을 다한 떡국차례가 끝나면 그토록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세배 시간이었지.
"절을 얌전하게 잘하면 이 할미가 세뱃돈 많이 주마. 꿇어앉고… 두 손 앞으로 내밀고… 고개 숙이고 옳지 옳지, 잘 한다! 우리 막둥이, 다 컸다!"
그런 소리를 들으며 절을 하고 나서 세뱃돈에 대한 기대는 얼마나 컸던지! 그 당시 세뱃돈으로 받았던 종이돈은 지금 것보다 조금 작았는데, 복을 많이 담으라는 뜻으로 한문자의 복복자를 수놓거나 금박을 입힌 그 복주머니는 실로 아이들의 기대와 설렘의 주머니였지.
집안 세배만 끝나도 제법 두둑했던 그 복주머니, 나는 이만큼인데 넌 얼마냐라면서 서로의 세뱃돈을 꺼내놓고 자랑하던 그 설날. 한 그릇을 다 먹어야 한 살을 더 먹는다는 떡국을 먹고 나면 다음은 성묘길이다. 때때옷을 입은 아이들이 신바람이 나서 앞장을 서고, 두루마기에 중절모 차림의 어른들이 그 뒤를 따르고, 제물을 인 집안 여자들이 그 뒤를 따랐지.
이 성묘 행렬이 일단 선산에 도착하면 그 동안 무슨 탈이라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 어른들은 묘소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곤 하셨지. 이어서 묘소 앞에다 제사 음식을 차려놓고 그 앞에 서열대로 줄줄이 늘어서는데, 누가 사촌 동생인지 오촌 조카인지 대충 따지며, 야, 내가 더 형이다. 넌 저 쪽이다. 형이라는 말을 듣고 싶고, 아제라는 말을 듣고 싶은 아이들이 자기 자리를 다투면서 티격태격하던 풍경 말고도, 절을 할 때면 엎드리는 것까지는 제법 흉내를 잘 내지만 언제 일어나야 할지, 그 타이밍을 잘 맞추지 못해서 고개를 땅에 박은 채로 옆의 동정을 살피면서 그게 우스꽝스러워서 킥킥거리면서도 조상님들한테 "이놈들!"하고 야단맞을 것 같아서 크게 웃지도 못했지.
하지만 그게 어찌 불손한 태도였겠는가. 지하에 잠들어 계신 조상님들께서도 그 티 없이 맑은 후손들을 바라보시면서 분명히 대견해 하셨을 텐데 말이지.
성묘를 다녀온 다음 순서는 동네 세배 돌기다. 집에 먹거리가 넉넉한 설날, 세배의 목적은 무조건 현찰 세뱃돈인데, 어떤 집은 떡 한 접시로 때우기도 하므로 이 집은 어떻고 저 집은 어떻다고 따져 가면서 세배를 다니기도 했지. 그렇게 모은 돈은 그동안 사고 싶어도 못 사던 것들을 실컷 사고도 남았는데, 눈깔사탕이니 유과니 비과니 양갱이니 엿에 묻힌 콩과자에다가 일회용 주스가루도 사서 물에 타먹고, 고무풍선도, 딱총도, 화약도, 장난감 시계도, 태엽으로 돌리는 팽이도 샀었지.
먹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게 왜 그렇게도 많았던지. 그 돈 쓰는 재미로 동짓달부터 기다려지던 그 설날.
그러고도 남은 돈은 결국 어머니의 주머니 속으로 쏘옥 들어갔는데, 지금쯤 그 돈은 어머니 주머니 속에서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정말 그랬었다. 그 시절 우리네 설날은 실로 대가족이 모여 연주하는 아름다운 교향곡이었고 대합창이었다.
하지만 요즘 설날 풍속도는 많이 변했다. 자녀들이 차 막혀서 고생한다고 부모가 상경하기도 하고, 휴대전화 문자로 세배를 대신하기도 하고, 일찌감치 관광지로 떠나서 호텔에서 차례를 지내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니, 이러다간 하늘나라의 조상들이 남태평양 등지로 차례음식을 먹으러 물어물어 찾아가는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요즘 하늘나라에서도 길 찾아가는 단말기인 내비게이션의 판매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는 소문이더라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