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예쁜 거짓말
김종산(안마사)
옛말에 3대 거짓말은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말, 처녀가 시집가기 싫다는 말, 노인이 죽고 싶다고 하는 말이라고 한다. 나를 많이 귀여워 해 주시던 우리 할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방학 때 시골에 내려가면 “아가, 집에 올 때 그냥 오지 말고 잠자다가 죽는 약 좀 사다줘. 이 할미는 살만큼 살았으니께 인제 편하게 저승으로 가야지.”라고 습관처럼 말씀하셨다. 한 두 번 들을 때에는 농담으로 들렸지만, 계속 들으니 괜히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할머니가 자꾸 죽어야 하겠다니 이게 될 말인가?
갑자기 내 머리 속에 할머니의 마음을 시험해 볼 좋은 생각이 하나 번개같이 떠올랐다.
“할머니, 내가 읍내 나가서 그 약 사 올테니께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안돼요. 만약 두 분이 아시면 난 맞아 죽을 거에요.”
할머니의 귀에 대고 속삭이니 고개를 앞뒤로 끄덕이셨다.
“그려, 걱정 말고 조심해서 갖다 와, 아무에게도 말 안할껴.”
격려까지 해 주시는 할머니를 뒤로하고 아무도 모르게 집을 빠져 나왔다. 약을 사려면 읍내까지 가야하지만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약이 아니라 작은 음료수 한 병이면 족하기에 동네 구멍가게로 달려갔다. 그 때는 잔존 시력이 제법 남아 있어 행동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고 약간 큰 글씨도 쓰고 읽는데 지장이 없던 때였다.
가게에서 오렌지 주스 한 병을 사서 병 둘레에 종이를 붙이고 사인펜으로 ‘잠자다가 저승 가는 약’이라고 크게 쓴 후 호주머니에 넣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할머니와 단둘이 시간을 가질 기회를 엿보았으나 좀처럼 오지 않았다. 할머니도 약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물어보시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후 드디어 기회가 찾아 왔다. 식구들이 모두 외출해 집에는 나와 할머니 단둘이 남았다. 나는 주스 병을 들고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 할머니와 마주 앉았다.
“할머니, ‘잠자다가 편안하게 저승 가는 약’이에요. 여기 보세요, 크게 써 있잖아요. 할머니 소원 풀어 드리게 돼 기쁘네요.”
할머니의 눈을 보며 조심스레 주스 병을 손에 쥐어 드렸다.
“그려, 잘 했구먼.”하고 병을 받아 든 할머니는 그다지 좋아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어서 잡수세요, 식구들이 돌아오면 못 드시니 지금 드셔야 편안하게 저승 갈 수 있어요.”
서두르라는 나의 재촉에도 할머니는 내 얼굴만 빤히 쳐다보셨다.
“아녀, 밤에 먹을테니께 걱정 말어”
할머니는 잡수실 생각이 없으신지 병만 만지작거리실 뿐이다. 몇 번 더 권해 봤으나 고개만 저으실 뿐 요지부동이셨다.
공부를 핑계로 할머니 방을 나왔다. 그리곤 문틈으로 할머니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잠시 멍하게 앉아 계시던 할머니는 한숨 한번 크게 쉬시더니 병을 들고 밖으로 나가셨다. 나는 들키지 않게 살금살금 뒤따라갔다. 잿간으로 가신 할머니는 “에이! 고연 놈 같으니”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신 후 손에 든 병을 잿더미를 향해 세게 던지셨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안으로 들어가셨다. 숨어서 지켜본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간신히 웃음을 참고 할머니가 버린 병을 찾아내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병을 꺼내 “이거 왜 안 잡수시고 잿간에 버리신 거에요?”라며 다그치듯 물었다. 할머니는 아무 말씀 못하시고 고개만 숙이셨다.
“할머니가 그렇게 소원하셔서 사다 드렸는데 안 잡수시면 어떻게 해요? 이 일을 부모님이 아시면 저는 맞아 죽을 거에요. 그러니 할머니 대신 제가 마셔 버릴 거에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나는 병에 든 음료를 꿀꺽꿀꺽 다 마셔 버렸다. 주스라서 입에선 너무나 달콤했지만, 죽는 연기를 위해 그대로 쓰러져 눈을 위로 까뒤집고 입으로는 거품을 내기 시작했다.
서투른 연기에도 할머니는 놀라셔서 이를 눈치채지 못하셨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달려들어 내 몸을 마구 흔드셨다.
“아가, 네가 죽으면 안되여, 이 할미가 죽어야지, 할미가 잘못혔으니께 어여 일어나!”
내가 계속 죽어가는 시늉을 하자 할머니는 밖으로 뛰쳐나가셨다. 그리곤 “동네 양반들, 내 손자 좀 살려줘유, 내 새끼가 약을 먹었슈”하며 큰 소리로 외치시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내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예상과 다르게 일이 커지자 당황한 나는 벌떡 일어나 “할머니, 제가 거짓말을 했어요”라고 소리치며 따라 나갔다. 그러나 이미 할머니는 동네로 사라지셨고, 잠시 후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와 함께 우리 집으로 몰려 왔다.
멀쩡하게 서 있는 나를 보신 동네 분들은 어리둥절하며 전후사정을 물으셨고, 나는 멋쩍게 웃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다 듣고 난 동네 분들은 한바탕 크게 웃고 나서 각자 집으로 흩어져 갔다.
그 후 할머니는 토라지셔서 말도 안 하셨고, 뒤늦게 아시게 된 아버지로부터는 심한 매 타작을 당해 나는 며칠 동안 몸이 아파서 일어나지 못했다. 토라지신 할머니를 달래려고 갖은 아양을 떨었고, 좋아하시는 사탕도 많이 사 드려 겨우 마음을 풀어 드렸다.
생전에 나를 그렇게 사랑해 주셨고, 하늘에서도 나를 언제나 지켜보실 할머니가 오늘따라 몹시 그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