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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향의 여름(정철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1-09-15 오후 4:34:53

조회수 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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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향의 여름(정철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1-09-15 오후 4:34:53 (조회 : 2502)

고향의 여름
정철우(대전대학교 보건대학원 객원교수)

  바람도 햇볕도 마음도 가을이다. 계절은 가을이지만, 오십 여 년 전 내 고향의 여름을 회상해 본다.
  내 고향은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 은석마을이다. 마을 뒷산은 마국산이고, 마국산의 최고봉은 해발 445m 오운봉이다. 마을 우측으로는 마국산 맑은 물이 사시사철 흐르고, 냇물을 젖줄삼아 들이 있어서 봄이면 진달래, 철쭉, 복사꽃, 살구꽃으로 마을이 붉게 물들고,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마을 전체가 단풍색으로 물들며, 겨울이면 흰 눈이 길길이 쌓여서 경치 좋고 인심 좋은 마을이다.
  내 고향에 7월이 오면 아름드리 살구나무에서 누렇게 익은 살구가 뚝뚝 떨어졌다. 살구나무에 올라가서 가지를 휘어휘어 휘어잡고 살구를 따 먹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오십 수년이 지난 추억이 되었다. 내 고향에 7월이 오면 마당가의 포도덩굴에 청포도가 송이송이 열렸다. 알알이 익어갈 때 바느질 가위로 포도송이를 싹둑 잘라서 차가운 우물물을 길어 씻어먹던 그 날이 엊그제 같은데, 오십 수 년 전 추억이 되었다.
  내 고향에 7월이 오면 멍석딸기를 따 먹었다.  멍석딸기는 숲 속에서 자생하고 덩굴에 달린다. 크기는 산딸기보다 두 배 세 배 더 크고 모양은 둥글며 색깔은 검붉고 맛은 새콤달콤하다. 내 고향에 장마비가 내리면 버섯이 지천으로 돋아났다. 갓버섯, 청버섯, 밀버섯, 꾀꼬리버섯을 따다가 소금물에 살짝 절이고 썩썩 빚은 햇감자와 함께 양은솥 바닥에 깐다. 그 위에 들기름을 슬쩍 두른 후에 보리짚, 밀짚으로 아궁이에 불을 때며 달달 볶다가 물을 붓는다. 햇밀가루로 반죽한 수제비를 뚝뚝 떼어 넣고 부르르 끓으면, 한 국자 두 국자 퍼서 바가지에 담아 땀을 뻘뻘 흘리며 먹었는데, 두 사람이 먹다 세 사람이 죽어도 모를 만큼 그 맛이 훌륭했다.
  내 고향에 여름이 오면 참외, 수박을 먹었다. 내 고향의 장날은 양력으로 3일과 8일이었다. 장이 서는 전 날 오후면 장에 내다 팔기 위해 참외, 수박을 땄는데 상품가치가 없는 것들은 아이들에게 돈을 받지 않고 거저로 나눠주었다. 시원하고 달콤한 참외와 수박의 향기, 거저먹는 즐거움은 한여름의 무더위를 날려주기에 충분했다.
  내 고향산천에 여름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리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모깃불을 피워놓고 금방 쪄낸 옥수수를 먹으며 별들의 전설을 들었다. 내 고향에 여름이 오면 호밀짚을 엮어 만든 거적을 밤나무 그늘에 깔아놓고 낮잠을 즐겼다.
  내 고향에 7월이 오면, 앞산 뒷산 숲에서 뻐꾸기가 울고 꾀꼬리가 울었다. 초저녁이면 똑똑새가 울었고 깊은 밤이면 소쩍새가 울고 부엉이가 울었다. 내 고향에 여름이 오면, 매미가 울었다. 미루나무 가지에서 감나무 가지에서 자지러지게 매미가 울었다. 내 고향에 여름비가 내리다 그치면, 앞논 뒷논에서 맹꽁이가 울었고 달 밝은 밤이면 개구리도 울었다. 내 고향 산천에 여름이 오면 냇물에서 개헤엄을 치며 미역을 감았다. 산골물이라 차가워서 물에 들어가면 척 늘어졌던 물건이 호두알처럼 오그라들고 추웠지만, 그래도 물이 좋아서 여름 내내 물에서 살았다.
  내 고향 산천에 여름이오면, 원두막을 지어놓고 저녁이면 처녀총각이 모여앉아 노래도 부르고 하모니카도 불고, 퉁소도 불었다. 달빛이 교교한 밤, 끊일 듯 이어지는 퉁소소리는 청상과부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그 때는 6.25 직후라서 마을마다 청상과부들이 많았다. 내 고향에 여름이 오면, 봉숭아 꽃잎을 백반과 찧어서 손톱 위에 얹어 놓고, 콩잎으로 싸서 실로 찬찬 매어 하룻밤 자고 나면 손톱에 봉숭아 물이 빨갛게 들어 있었다. 내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여 주던 여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아흔을 바라보는 상노인이 되어 있다.
  맹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던 날, 맹학교에 가서 공부해가지고 돈 많이 벌면 고향산천에다 논사고 밭사고 기와집 짓고 나리꽃처럼 청순한 아내 만나서 천년만년 살고 싶었는데, 그 꿈은 이루지 못한 채 인생은 늙었다. 타향살이 몇 해던고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반 백 년에 청춘만 늙었다. 가고지고 가고지고 고향산천으로 가고지고. 살고지고 살고지고 고향산천에서 살고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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