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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양화진 성지를 다녀와서(조재훈)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2-02-01 오후 5:09:00

조회수 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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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양화진 성지를 다녀와서(조재훈)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2-02-01 오후 5:09:00 (조회 : 2435)

양화진 성지를 다녀와서
조재훈(전 한빛맹학교장)

  나는 해마다 8월 25일이면 송암 박두성 선생님의 추모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점자를 만드시어 한국 시각장애인들의 문맹을 퇴치시키신 고마움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박 선생님은 직업교육으로 자립을 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걸인 취급을 면치 못하던 사람들에게 석 박사 학위까지 받게 한 것은 물론 세계 1등국인 미국에까지 진출하게 하셨다. 그것도 미국 이민 역사상 최초로 시각장애인이 백악관의 정책차관보에까지 오르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점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니 미국인 선교사 홀씨의 가족을 잊을 수 없었다. 홀 여사는 4점짜리 점자를 가지고 한국의 시각장애인들에게 최초로 신교육을 시작한 분이기 때문이다. 소위 뉴욕포인트란 4점 점자를 가지고 6점 점자인 훈맹정음이 제정되기 약 30년 전부터 시각장애인들의 현대 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1898년 홀 여사의 평양 맹학교가 생기지 않았다면 1913년 일제는 제생원을 시작하지 않았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홀 여사는 시각장애인들을 일반 학생들과 함께 통합교육을 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가장 소외당하고 있는 맹인 여성들에게도 바느질까지 가르치게 하였다. 그 결과 홀 여사의 회갑에는 시각장애인이 지은 한복을 차려입고 나갈 정도였다. 그 때의 기념사진은 지금까지 보전되고 있다고 한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당시 맹인 여성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집에 들어가 씨받이 역할이나 할 정도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일반 학생들과 동등하게 교육을 시킬 뿐 아니라 나중에 일부에게는 일본 유학까지 가게 하였으니…
  홀 여사의 업적은 그것 뿐이 아니다. 의료 선교사인 남편을 따라 우리나라 신의학 발전에도 큰 공을 세웠다. 심지어 남편은 환자를 치료하다 지쳐 나중에는 병까지 더하는 바람에 사망하였고 그 아들까지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는 수 없이 이역만리 타국 땅인 마포 강변에 묻히게 되었다.
  식민지 역사를 보면 서양인들은 맨 처음 선교사들에게 성경을 가지고 미개지에 가게 하였다고 한다. 그 다음은 개항을 재촉하고 나서 나중에는 군함을 보내 마침내 점령을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이 선교사들이 식민지 침략의 앞잡이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우리나라가 이미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선교사들이 독립투쟁의 선봉대가 되어 있었다. 그 뿐 아니라 미개한 국민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여러 곳에 학교를 세우고 유학을 시켜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영국으로부터 식민지 생활을 하다 독립한 미국인들은 자기들의 쓰라린 과거를 바탕으로 한국인들에게 대하여 한층 호의적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목숨을 다 한 선교사들이 많다. 이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가 마포구 합정동에 있다. 또 그 옆에는 천주교의 순교자 묘지도 있다. 산 생김새가 누에의 머리와 같다하여 ‘잠두봉’이라고도 하지만 하도 많은 천주교인들이 목이 잘려 ‘절두산’이라고도 알려진 곳이다. 따라서 그 곳은 개신교와 구교를 아우르는 성지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이곳을 벌써부터 가고 싶었다. 그러나 동행자를 구하지 못하여 하루하루 미루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지난 해 11월 10일 결단을 내려 혼자 집을 나서게 되었다. 한글점자기념일을 지낸 뒤 더 이상 마음의 짐을 그대로 지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던가? 그 날이 바로 대입 수능시험일이라 복지콜이 잡히질 않았다. 114 전화를 거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사무실에 알아보니 오전 10시까지 도착하면 40분짜리 동영상을 비롯하여 안내도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예약을 하면 개인 안내도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모처럼의 성지 참배라 변변치는 않지만 조화도 마련하였으므로 시간을 미룰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택시를 불러 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예정에 미치지 못하여 동영상의 일부는 놓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은 안내인이 예약한대로 설명을 친절하게 잘 해주어 불편할 것이 없었다. 묘역은 기독교 100주년 사업회에서 잘 조성하여 놓았기 때문에 관련 교인들 뿐 아니라 관광객도 찾는 모양이었다.
  홀 여사까지 합하여 세 사람이 잠들어 있는 가족묘에는 대리석으로 공적비까지 세워져 있었다. 이화여대의 동대문 병원도 그렇지만 우석의대도 이분들의 공로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비록 초라한 국화꽃이지만 그 앞에 바치고 묵념을 올리자니 서러움에서였을까 잠시 눈시울을 붉히게 되었다. 안내인의 말을 들으니 그 곳에서 봉사원으로 일한지 1년이 좀 넘었지만 홀 여사의 묘소를 찾은 시각장애인은 내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고 하였다. 2호선 전철의 합정역에서 내리면 도보로도 불과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길도 완만하여 산책길로도 아주 좋았다. 이곳을 찾기가 그렇게나 멀게 여겨졌던 것이다.
  양화진 나루가 있던 데라 바로 앞에는 강변도로를 사이에 두고 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나를 안내하던 분은 친절하게 전철역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리고 시각장애인들을 위하여 어떤 편의시설이 필요한지도 물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기가 어려웠다. 시각장애인들이 자주 찾지 않으니 예산을 들여 무엇을 차려놓는다는 것이 무용지물 같았기 때문이다.
  하여튼 우리나라가 이만큼 발전하여 장애인들의 복지에까지 신경을 쓸 수 있게 된 데 대하여 한 마디 할 말이 생각나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이룬데 대하여 감사해야 할 곳이 하나 더 있음을 빠지지 않고 전해야 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갖은 고통을 겪으며 사랑과 소망의 씨를 뿌려 준 외국인 선교사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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