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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소산성에서(정철우)

작성자 점자새소식

작성일 2018-08-01 오전 9:30:18

조회수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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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소산성에서(정철우)
작성자 점자새소식 작성일 2018-08-01 오전 9:30:18 (조회 : 2332)
부소산성에서
정철우(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상임위원)
 
  초여름날 부소산에 오르면 송림 속에서 불어오는 솔바람 향기에 한없이 행복하다. 녹음 속에서 흘러나오는 이름 모를 산새들의 울음소리에 정신이 맑아진다. 부소산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자리하고 있다. 부소산의 높이는 해발 106m이고, 부여읍 관북리 산 4번지가 부소산성이다. 백제는 서기 538년 도읍을 부소산성으로 옮겼고 그로부터 122년 후인 서기 660년에 김유신의 신라군과 소정방의 당나라군에 의해 멸망했다. B.C. 18년에 건국해서 678년 만에 멸망한 것이다.
  백제가 멸망하자 부소산성의 삼천 궁녀들은 나당연합군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고자 백마강변 언덕에 있는 바위에 올라 몸을 강물에 던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다. 삼천 궁녀들이 강물에 투신할 때, 그들이 입고 있던 울긋불긋한 비단옷이 꽃처럼 아름다워서 ‘떨어질 낙’, ‘꽃 화’, ‘바위 암’, ‘낙화암’이라고 부른다. 바위 위에서는 낙화암의 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고, 강물을 오르내리는 유람선 황포돛배를 타고 멀리서 보아야 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낙화암을 중심으로 강 상류 약 80m 지점에 백화정이 있고, 강 하류 약 100m 지점에 고란사가 있다. 고란사 뒤편에는 고란약수와 고란초가 있다. 고란초는 고사릿과의 식물로 관광객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유리 하우스 속에서 세 포기가 자생하고 있다. 고란약수 우물가에는 자연산 바가지가 놓여 있다. 이 바가지로 약수를 떠 마시노라면 어린 시절 고향마을 초가지붕 위 싱싱한 박넝쿨에 주렁주렁 열려있던 박이 연상된다. 시계가 흔치 않던 그 시절, 내 고향 마을 아낙네들은 초가지붕의 박꽃, 마당의 해바라기와 분꽃을 보고 시간을 짐작했다. 해바라기의 순이 하늘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정오 무렵이고, 약간 서편으로 기울면 점심 무렵이 지난 것이다.
  박꽃과 분꽃은 일광이 싫어서 밤에 피었다가 낮에 지는 꽃이다. 달맞이꽃도 그러하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 박꽃과 분꽃이 피기 위해 꽃봉오리가 약간 벌어지면 저녁 짓기를 시작했고, 많이 벌어지면 저녁이 늦었다고 허둥지둥 서둘러 저녁을 지었다. 초가을이 지나고 늦가을이 오기 전에 박을 따서 굵은 바늘로 찔러 쑥쑥 들어가는 박은 버리고, 바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박을 골라 톱으로 켜서 가마솥에 푹 삶은 후에 박 속은 긁어 버리고 그늘에 말리면 그것이 자연산 바가지이다. 가난해서 그릇 살 돈이 없던 그 시절, 바가지에 아욱국을 푸고 뜨끈뜨끈한 보리밥을 말아먹던 그 시절, 각종 야채와 뜨끈뜨끈한 보리밥을 바가지에 담아 비벼 먹던 그 시절, 삶아 건진 국수를 바가지에 담고 열무김치와 고추장을 넣어 비벼먹던 그 시절이 엊그제만 같은데, 먼 옛날 전설처럼 뇌리 속에 아련하다.
  옛날 백제의 땅 소부리 마을에 재산은 많이 있었으나, 슬하에 자녀가 없어 외로이 사는 노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금당사 노승이 시주 차 마을에 내려왔다가 노부부에게 말하기를 부소산성에 가면 고란약수가 있는데, 이를 마시면 젊어질 수 있다고 말했단다. 다음 날 조반을 일찍 마친 바깥노인이 약수를 마시러 집을 나섰는데 해가 지고 밤이 되어도 오지 않더란다. 안노인이 찾아가 보니 우물가에 노인은 없고 노인의 옷을 입은 갓난아기가 울고 있었다고 한다. 약수를 조금 마셨어야 하는데, 욕심껏 마셔서 젊어지다가 젊어지다가 아예 갓난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아기가 자라서 백제의 최고 벼슬인 좌평에 올라 선정을 베풀었다는 전설이 있다.
  부소산성에 가면 사비길이 있다. 사비길의 양편에는 수목이 울창해서 여름이면 숲 터널을 이룬다. 매미가 울고, 뻐꾸기, 꾀꼬리, 소쩍새, 산비둘기가 운다. 나뭇잎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이온이 있어 마음이 상쾌해진다.
  부소산성에 가면 군량미를 저장했던 창고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불에 타고 군창터만 남아있다. 군창터의 흙을 파면 타다 남은 쌀과 보리가 지금도 나온다고 한다. 불에 타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불에 타면서 쌀과 보리가 볶아졌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한다.
  부소산성에 가면 삼천 궁녀의 넋을 모신 궁녀사가 있고, 백제의 삼충신인 계백, 성충, 흥수의 넋을 모신 사당은 있지만, 의자왕의 넋을 모신 사당은 없으니 한 인간의 부귀영화가 허무하고 무상함에 눈물이 흐른다.
  부소산성에는 금당지, 목탑지, 회랑지, 중문지의 옛터가 잔디밭으로 보존되어 있다. 잔디밭 여기저기에는 아름드리 벚나무가 자라고 있다. 벚꽃이 분분하던 어느 봄날 낙화하는 벚꽃을 바라보며 삼천 궁녀들은 무슨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삼천 송이 꽃, 한 마리 나비,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하다. 한 송이, 한 마리의 나비가 서로 어우러져 가는 봄을 즐기다가 꽃은 지고 나비는 죽어 생리사별의 고통이 자연의 법칙임을 뭇 생물들에게 알리는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으려니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하다. 고즈넉한 부소산성, 백마강, 모래턱,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 물새 울음소리, 어느 것 하나 슬프지 않은 것이 없다.
  부소산 제일 높은 곳에 사자루가 있다. 날씨 좋은 날 이곳에 오르면, 부여 서천의 풍경이 눈 아래 펼쳐지고 발아래 강물이 흐르고, 불어오는 산바람, 강바람이 일만 근심을 실어가니 예가 선경이 아니면 어디메가 선경이랴.
  부소산성의 애환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에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고 고란사 저녁 종소리에 나그네 마음이 서러워질 때, 백화정에 올라 생각에 잠긴다. 1400여 년 전, 향락에 젖어 분별없는 삶을 살다가 나라를 지키지 못한 백제인들과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삶이 어떻게 다른가를.
(2018. 8. 1. 제10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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