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잔소리
이진규(임대업)
도시생활 40년이 넘도록 여태 거실을 마루라 하고 주방을 부엌이라 말하는 둥, 조금 촌스러우면서도 잔소리의 기능보유자인 듯 얼굴만 마주치면 다발식 잔소리를 마구 쏟아내는 우리집의 규율부장, 그는 아내라는 이름의 여인이다.
그의 잔소리가 결코 이치에 벗어나는 건 아니나 문제는 내가 너무 억울함을 느끼는 데 있다. 회초리도 잘못을 알고 맞으면 덜 아플 터인데 나는 내 잘못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당하므로 더욱 억울한 것이다.
아내의 잔소리 메뉴는 무지 다양한데 그 대부분이 나의 노동력을 턱없이 증가시키는 약점이 있어 늘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속옷 갈아입기와 샤워는 이틀마다 실시하고, 소변을 볼 때는 신경 써서 정조준하라는 멘트까지 날린다.
날마다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나 주무르고 사는 전업백수인 내가 항상 향기롭고 깔끔한 자태를 유지할 필요성은 무엇이며, 그런 것들이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여 내 일신의 편안함보다 우선하는 가치인가하는 따위가 내 불만의 주요 레퍼토리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요구에 나는 반발심이 울컥거리지만 행동이나 말로는 표현하지 않는 입장을 채택하고 있다.
남들이 알면 이러고 사는 나를 매우 무던한 성격이거나 감정을 억제할 줄 아는 고급형 인간이라고 오해할 수 있겠으나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무시로 욕도 하고 저주도 하지만 속으로만 웅얼거리는 나만의 끌탕이므로 그 내용을 아는 것도 나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내 처지를 가엾이 여겨 왜 그렇게 당하고 죽어만 사느냐고 묻는다. 그럴 때를 대비하여 써먹을 대답을 나는 일찌감치 준비해 두었다. 남한테 말할 때는 조금 고상할 필요가 있어 신경 좀 쓴 문구다. '초로인생 백년인데 무대응은 상책이요 다툼은 하책이지요'라고.
어제는 아들 녀석이 기껏 주문해온 개소주를 안 먹겠다고 뻗대다 소나기 잔소리에 흠씬 당하고 있었다. 그럴 때 나는 발자국을 죽이고 살살 욕실로 향한다. 사건 현장에서 몸을 빼는 만큼 안전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나는 일찍이 터득하고 있었던 거다. 실상 욕실에 들어가서 내가 할 일은 별로 없다. 그냥 귀를 쫑긋 세우고 바깥 동정을 살피는 게 전부다. 아니, 한 가지 일이 더 있다. 그냥 수도를 틀어 물소리를 내는 일이다. 내가 일부러 그짓을 하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다. 발닦이나 머리감기를 하는 척하여 아내의 깔끔떨기 운동에 발맞추어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이려는 내 나름의 노하우다.
그런 거 말고도 내가 감내하고 사는 애환은 또 있다. 그건 아들과 나를 대우하는 태도에 있어 그 편차가 너무 크다는 거다. 아들눔이 밥상에서 끼적거리면 반찬이 부실한 탓이라 여겨 미안해 하면서, 내가 입맛이 없어 한두 끼를 거를 때는 먹든 말든 무관심, 무반응, 완전히 내놓은 군식구 취급이다.
며칠 전에는 정말 험한 일도 있었다. 유명 브랜드 점퍼 한 벌을 들고 들어온 아들이 그걸 내 앞에 내려놓으면서 "아버지 외출복이 좀 부실해 보이길래 사왔으니 입어보세요" 이러는데 옆에서 아내가 불쑥 내뱉은 말은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서늘하다.
"아버지는 네가 입던 헌옷만 걸치고 다녀도 너끈하니 이런 고급 옷은 네가 입어라" 이러는 거다. 아니, 내 비록 집안에서 두문불출 면벽하고 참선하는 모양새로 살망정 어찌 그러이 머슴도 상머슴 취급을 하는가싶어 당장 뛰쳐나가 머리 깎고 절로 가려다 날씨가 하도 추워서 도리없이 겨우 참았다.
그 와중에 마침 여동생 내외가 왔길래, 이때다 싶어 나의 가련한 현실을 타개할 좋은 기회로 여기고 여동생과 매제를 식당으로 청하여 내 기막힌 속사정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하지만 돌아온 결과는 매우 참담했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내 나태와 게으름이 원인이므로 백번 당해도 싸다는 거였다. 그 순간 나는 울컥하여 당장 술상을 왕창 뒤집어 엎으려다 안주가 아까워서 꾸욱 참았다.
그러이 형벌 같은 나날 중에도 꽃 피고 새 우는 날도 더러 있다. 아내가 친구들과 여행을 가는 날이 바로 그런 날이다. 떠나기 전에 아내는 늘 이런다.
"당신은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그럴 때 나는 끼니를 굶어도 좋으니 어여 떠나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냥 꿀꺽 삼키고 만다. 자칫 여행을 포기하고 주저 앉을까봐 겁이 나서다. 그러나 떠난 지 사흘쯤 되면 나는 어떤 목소리 하나를 손꼽아 기다리는 나를 발견하고 흠칫한다. 그건 역시 "당신은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요"라는 목소리다.
아내의 잔소리와 남편의 게으름은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파열음일까?
오늘도 아내의 잔소리를 침묵으로 방어하며 하루를 아슬아슬 넘기는 나는 아무래도 된통 불쌍한 남자다. 누가 나 좀 구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