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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인이 아흔아홉 몫을 해야 머슴도 한 몫 한다던데...(전숙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11-01 오전 10:00:08

조회수 2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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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인이 아흔아홉 몫을 해야 머슴도 한 몫 한다던데...(전숙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11-01 오전 10:00:08 (조회 : 2657)
주인이 아흔아홉 몫을 해야 머슴도 한 몫 한다던데...
전숙연(한빛맹학교 교사)
 
  시각장애인 생활을 하게 된 지 20년이 넘었다. 고향인 부산에서 처음으로 장애인 수첩을 등록하고 기초재활훈련을 받게 되었을 때 교육 과정 중에 보행교육이 있었다. 당시를 회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그것은 흰지팡이 기본 교육 두 번 만에 내려진 미션 때문이었다. 생소한 도로 연석을 치며 기준선 보행하다가 횡단보도를 만나면 왼쪽으로 건넌 후 슈퍼마켓 찾기와 지시한 물건 사서 복지관으로 되돌아오기였다. 당황했고, 두려웠고, 난감했다. 기준선이 무엇인지 연석은 또 뭘까?
  주저하는 마음으로 등 떠밀려 걷기 시작했다. 서너 걸음에 터치되는 자동차인 듯한 물체. ‘앗! 어쩌지, 차를 어떤 방향으로 돌아야하나?’ 겨우 겨우 인도와 차도를 겹쳐 주차한 차량을 몇 대 지나서 횡단보도에 온 듯했다. 극도로 긴장하며 횡단보도를 건너서 슈퍼를 찾았다. 지시한 물건을 사서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와 몇 걸음 걷다보니 계산을 잘못 한 것 같아 다시 되돌아가서 돈을 건네주고 나왔으나 되돌아갈 생각에 미션을 완수했다는 기쁨보다도 걱정이 앞섰다. 내가 받은 보행 교육은 겨우 흰지팡이 사용법과 뜰 걸어보기 아니었나? 되짚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차도로 내려서서 택시를 잡을 요량으로 손을 번쩍 들었더니 큰 호통이 나를 나무랐다.
  “전숙연 씨! 언제 택시 타라 그랬어요? 오늘 미션은 걸어서 되돌아오는 것이었을 텐데요.”
흰지팡이를 차도로 던졌다.
  “선생님이 언제 저희에게 이런 거 가르쳐 주셨나요? 기준선을, 연석을. 여기까지 온 것도 목숨 걸고 왔어요.”
  “저도 안대 끼고 해보니 가능 했어요.”
  “눈 보는 선생님이 안대 끼기 전에 랜드마크 파악하고 연습한 후 다시 볼 수 있는 거랑 어제나 오늘이나 앞으로 내내 못보고 살게 될 저랑 같다고 생각하세요? 제대로 잘 가르쳐 주시고 실험 하셔야죠. 다시는 이따위로 목숨 걸기 싫어요.” 그날 이후 보행시간에 참여하지 않았다.
  기초재활훈련은 끝났으나 나는 할 수 있는 것 하나 없이 다시 방콕이었다.
  심리적 재활을 위하여 다시 찾은 서울에서의 기초재활훈련이 나를 성숙시켰다. 일주일간의 기초재활훈련 오리엔테이션 동안 기다란 케인으로 강당에서 이단 터치로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 속에 어느덧 나는 시각장애인이 되어 있었다. 시각장애인으로서 우아하게 당당하게 공작부인처럼 장군이 사열하는 것처럼 고개를 들고 위엄 있게 뚜벅뚜벅 걷다보니 나는 시각장애인이 되어 혼자 마을버스 타고 길을 건너 버스승강장으로 가서 리무진 타고 공항으로 가고 있었다. 공항에서 안내를 요청하여 부산행 비행기를 타고 김해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니 환영과 꾸중이 요란하였다. 처음으로 시도해본 흰지팡이와의 승리였다. 스스로의 독립에 뿌듯했고 자랑스러웠다. “길에 나가면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들이 더 많아 천만인과 대화하며 왔어. 걱정 마! 이제 잘 할 수 있어.” 걱정하는 가족들을 안심시켰다.
  시각장애인끼리 여행하기, 시장가기, 지하철 타기, 버스타기 등을 통해 나는 정체성을 회복하고 재활할 수 있었으며, 가족 또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흰지팡이가 내게 가져다준 축복의 선물이었다.
  그러나 야간 대학원 통학으로 야심한 시각에 이동해야 하는 불안감으로 안내견 교육을 받게 되었고, 분양 받은 안내견과 생활하면서 10년을 지냈다. 따뜻한 온기를 나눠주면서 순도 높게 나를 지키고 언제나 나만 바라보는 안내견 덕분에 무사히 공부를 마치고 직장에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족같은 안내견이 쓰러지고 병원생활이 길어지면서 원래의 흰지팡이 생활로 돌아왔다.
  이렇듯 방황하면서 다시 찾은 흰지팡이... 흰지팡이는 우리 시각장애인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상징과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활동보조서비스를 받아 안락해지고, 근로지원제도가 있어 직무능력이 향상되었으나 24시간 내 곁을 지켜주는 것은 오직 흰지팡이뿐이다. 무생물인 흰지팡이는 휴대가 간편하여 안내인이나 안내견을 동반했을 때와는 또 다른 독립적인 업무와 일상생활 수행의 장점이 있다. 안내견을 돌볼 때의 시간적, 심리적, 경제적 부담도 없다. 안내인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사생활이 보장되고, 안내인을 기다리게 했을 때의 불안과 2인분 이상의 경제적 부담도 해소된다.
  안내견과 함께 했던 시간이 있었고, 안내인과의 동반도 간혹 있지만 나는 흰지팡이와의 독립과 여유와 익명성을 선택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여분으로 직장에 하나, 집에 하나, 가방 속에 하나 주기적으로 돌려가며 사용하고 수리해둔다. 이 흰지팡이 생활을 더욱 확장시키기 위하여 이따금 새로운 길을 탐색한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한 번에 하나씩 차근차근 해 나가고 있다.
  ‘주인이 아흔아홉 몫을 해야 머슴도 한 몫 한다’고 다그치시던 어머니는 머슴을 부릴 돈이 있어도 아는 게 있어야 부린다, 나중을 위해서 배워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말씀대로 흰지팡이와 안전한 여행을 하기 위해 꾸준히 탐색한다. 익숙지 않은, 변화가 많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만 하는 길을 나설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려 망설이게 될 때를 대비하여 흰지팡이의 감각을 잃지 않도록 준비한다. 그러면 두렵던 두근거림이 설렘으로 바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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