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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을이 간다 (이진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1-13 오후 6:39:58

조회수 3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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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을이 간다 (이진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1-13 오후 6:39:58 (조회 : 3072)
가을이 간다
이진규(임대업)
 
  뜨락에 서성이는 낙엽 향을 방으로 들이려 창을 열자 마른 잎이 먼저 들어서며 가을 편지란다.
  그렇다. 우주가 걸어놓은 알람이 또 가을 끝자락이다. 만추의 허전함이 존재의 경이로움을 퇴색시키며 삶의 의미를 거듭 묻는다. 온 산야도 우수를 붓에 찍어 갈색의 시를 쓰며 명상에 들고, 가을빛 내 산책로의 계곡물도 돌돌돌 이별을 노래한다.
  쓸쓸함도 허접한 일상을 걸러내는 정화기능이 있음이니, 나무들이 잎 떨어진 생채기를 침묵으로 매만지며 땅속 깊숙이 뿌리로 통곡하는 만추에는 나는 어김없이 가을 마니아가 되어 고별의 쓸쓸함에 젖어 나를 다시 들여다보는 기회를 얻는다.
  오늘처럼 맑고 청정한 가을에는 낙엽이 뒹구는 산에 올라가 한 그루 나무처럼 조용히 사색에 잠겨도 좋을 그 가을이 떠나려 한다. 우리의 영혼을 춥게 하고 마침내 우리를 허무라는 지향 없는 방황 속으로 내몰면서도 우리의 심연을 맑게 하고, 영혼을 슬프게 울리고, 고독이라는 시간 앞에 무릎 꿇게 한다.
  모두가 잠든 가을밤에 창가에 서보아라. 목까지 차오르는 외로움인지 그리움인지 쓸쓸함인지 한 마디로 말 못할 것들이 가슴에 달그락대는 소리가 나지 않던가. 그건 근원을 모르는 멜랑콜리나 센티멘털 같은 희한한 것이어서 그것을 나는 그저 가을 현기증이라고 부른다.
생명을 가진 자는 누구나 푸르게 태어나 붉게 피었다가 검회색의 흙으로 돌아가는 그 한계에 매인 얼개를 아무도 거역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먼저 가신 이들의 사후가 궁금하나 아무도 그 회신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우리는 가을이 가는 소리에 귀를 열고 가을이 전하는 한 편의 가르침을 듣는다.
  자연의 순리에 먼저 적응한 가을은 그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익은 열매를 땅에 묻어야 또 다른 내가 태어난다는 이치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가을이 깊은 밤에 쉬이 잠들지 못하는 영혼은 곱고 착한 영혼이다. 가을밤을 지키며 가슴 저려 하고 애달픈 그리움으로 가슴 적시는 영혼은 지순하고 순결한 영혼이다. 그건 부끄러움이 아니며, 가식이 아니며, 철없음이 아니며, 위선은 더욱 아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가 누구에게 보이고자 함이 아니고 오로지 나 스스로 느끼어 표현되는 것이어서다.
저 옛날 우리에게 삶의 깊이를 밝혀준 철학도 긴긴 가을밤에 달빛 아래서 태어난 일깨움이라 하지 아니 하던가.
  그렇다, 가을밤을 쉽게 잠들 수 있는 사람의 영혼은 메마른 영혼이다. 가을을 건너며 아무런 느낌이 없는 영혼은 이미 아름다움을 잃은 영혼이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느껴야 할 삶의 아픔이나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가엾은 영혼이다.
  그러기에 가을밤에는 일찍 잠들지 말자. ‘그때 그렇게 가시 돋힌 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그때 그렇게 모진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함부로 던진 말에 그가 마음을 다쳤으면 어쩌지!’
  그런 거 말고도 가을은 내가 대답하기 부끄러운 엉뚱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거지반 잊고 살던 얼룩 같은 나의 에로스의 시간을 끌고 와 그 얄궂은 시간을 비웃기도 하고, 이미 남이 된 그 사람을 되뇌어 한번쯤 그 이름을 불러보게도 한다.
  그 모든 것들이 범속하고 덧없는 것이라며, 탁한 기억들은 버리고 맑은 추억만 마시라고 내 어깨를 툭 치기도 하는 가을이 간단다.
  가을밤에는 창문을 열고 자성록이라도 한 구절 펼쳐놓고 읽어 볼 일이다. 그리하면 거기에 일상의 소란 속에서 망각했거나 잠시 놓치고 살아온 것들이 반성의 시간으로 다가와 우리에게 벌을 주기도 하는 계절이 가을이다.
  마음은 지향 없는 길을 걷고 먼 하늘가를 헤매는 가을이 간다. 가을을 내 것으로 호흡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가슴이 배고픈 거러지다.
  일상이 아무리 건조하고 복잡하고 권태로워도 가슴 가득 번져오는 가을이 들려주는 가을 이야기를 마음껏 숨쉬자. 오늘도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러 저 하늘을 머리에 이었음이니 아직도 눅눅한 내 마음의 한 자락을 가을볕에 보송보송 말릴 일이다.
  늙어간다는 건 조금씩 익어가는 거라지 않던가. 낙엽은 익을수록 그 바스락댐이 구성지다. 우리도 단풍처럼 빨갛게, 은행잎처럼 노랗게 저 낙엽 향을 마시고 음미하며 가을과 함께 또 떠나가 겨울 속에서 된장처럼 무럭무럭 익어 구성진 음계의 노래를 부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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