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은행 문턱에 걸려 비틀거리다
“제일 어려웠던 건 한글로 금액을 쓰는 겁니다.”
이것은 시각장애인 P 씨가 은행에서 겪었던 일 중 가장 난감한 일에 대한 답이다. 은행에서 서류 작성을 하다 보면 이름과 서명만큼은 전맹 시각장애인도 피해갈 수 없다. 하지만 이름과 서명만 연습한다고 해서 은행 업무를 모두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통장을 개설하거나 체크카드를 발급받는 경우 등 가벼운 업무에는 이름과 서명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대출을 받는 경우가 대표적인데 민감한 금융 업무에는 대출받을 금액 같은 것들을 전맹 시각장애인도 직접 묵자로 쓸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삼천육백만 원’을 묵자로 써야 하는 것이다. 은행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신용카드 발급 역시 까다로운 편이다.
에이블뉴스 3월 8일 자 보도에 따르면, 시각장애인 진모 씨는 신용카드와 바우처 결제 기능이 포함된 국민행복카드를 발급받기 위하여 SC제일은행 낙원동지점에 방문했다. 당시 창구 직원은 신용카드 발급을 위해선 서류 전체를 시각장애인이 직접 작성해야 한다고 말했고, 진모 씨는 전체 서류 작성은 어려우니 이름과 서명만 하겠다고 했다. 이에 직원은 본인이 무조건 서류를 다 작성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서류에 있는 글씨가 보이긴 하세요?”, “글씨도 안 보이는데 카드 사용은 어떻게 하고 사용 내역은 어떻게 확인할 것이냐?”라고 말하는 등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발언도 했다. 진모 씨는 이에 대하여 SC제일은행에 공식 사과와 재발방지 대책을 요구하였고,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제기하였다.
SC제일은행의 운영법인은 스탠다드차다드은행이다. 영국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금융회사이다. 2005년 제일은행을 인수해 국내에서는 SC제일은행으로 영업하고 있다. 스탠다드차다드은행은 전 세계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실명예방사업, 개안수술 지원 등 시각장애인을 위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다. 국내에서도 시각장애인 걷기대회, 착한도서관 프로젝트, 개안수술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시각장애인들을 지원하고 있다.
이처럼 시각장애인을 위해 봉사하는 SC제일은행에서 장애인차별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시각장애인 사회에 충격을 주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시각장애인 통신망 넓은마을에는 “제일은행과의 거래도 당분간 중단하는 불매운동을 실시할 것을 제안합니다”라는 내용의 게시물이 올라오고 동감의 댓글이 다수 달리기도 했다.
SC제일은행 규정에는 시각장애인이 직접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할 수 있다면 신용카드 발급에 문제가 없다. SC제일은행 낙원동지점 관계자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해당 직원이 개인정보 등의 민감한 문제를 다루다 보니 잘못된 응대를 하게 됐다”며 “직원 교육에 만전을 기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렇다면 묵자로 이름을 쓰기 힘든 시각장애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성년후견인제도가 있지만 실효성은 거의 없다. 성년후견제도는 노령, 질병, 장애 등 정신능력의 부족함으로 인해 일상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부족하거나 결여된 성년자에 대하여 가정법원이 후견인을 선임하여 신상보호와 재산관리를 수행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최종 후견인 선임에 이르기까지 6개월에서 12개월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대로 준수되는지를 모니터링하는 시민단체의 활동가인 시각장애인 K 씨는 “성년후견인제도는 악용되기 쉽다”며, “장애인 스스로 양말 한 켤레 살 수 없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고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금융기관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장애인차별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임경억 정책실장은 “장애인단체, 은행, 금융관계기관 모두가 동의하는 ‘장애인 응대매뉴얼’을 만들어서 금융기관 전체가 이를 준수하도록 해야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연합회는 현재 대표적인 시중은행부터 면담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낼 계획이라 한다. 임 실장은 “우리가 은행에게 장애인 차별을 해선 안 된다고 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시각장애인들도 변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은행 업무는 재산을 다루는 것이므로 엄격해야 하기 때문에 시각장애인들도 비록 불편하지만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시각장애인들도 이름과 서명, 대출을 받을 경우에는 금액 등을 묵자로 쓸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은행들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들이 정안인들과 어울려 살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도 중요합니다.”
은행 업무에서 겪는 장애인 차별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은 개선되지 않았다. 또 금융기관에서 겪는 문제가 시각장애인만의 문제도 아니다. 한시련을 비롯한 장애인단체들과 장애인 당사자들의 관심과 노력이 절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사건은 또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2017. 4. 1. 제974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