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 따라 음량이 변경되는 음성안내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각장애인들은 차량 번호나 정차역 등의 대중교통 정보를 음성안내에 의존한다. 정류장마다 설치되어 있는 버스도착정보단말기의 안내와 지하철의 차량 내 방송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음성안내가 시각장애인의 이동에 이처럼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정작 소리가 작아 불편을 겪었다는 사례들이 있다.
서울에 거주하는 A씨는 주로 이용하는 정류장의 안내음성 소리를 두고 1년 넘게 지역주민과 민원제기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소리를 줄여달라는 지역주민의 민원과 소리를 높여달라는 A씨의 민원이 수차례 오고갔다.
A씨가 안내음성의 소리가 작아 정류장을 이용할 수 없다고 시청에 민원을 넣어 음량이 커졌다가, 곧 지역주민들의 민원으로 다시 작아지는 것이 반복되고 있다.
서울시 버스정책과는 “일정 수준에 맞추어 조정하고 있으나,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며, “교통약자를 위해 운영되는 음성안내이므로, 버스도착정보단말기 음성 크기는 언제라도 조정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버스정류장 인근 지역 주민들이 새벽 시간에 소리가 크다고 민원을 제기하는 것에 대해 “단말기는 원격 조정이 안 되고 직접 단말기를 조정해야 하므로 시간대에 따라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설명했다.
그때그때 민원에 따라 음량 크기를 조절할 수밖에 없는 것은 지하철도 마찬가지다.
지하철의 경우 각 노선이나 차량에 따라 음량이 다른데, 거의 매일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각장애인 B씨는 1주일에 2~3회 꼴로 승무원에게 방송 소리를 키워달라고 건의한다고 한다.
서울메트로(1~4호선 운영)는 “안내방송 음량은 운행하기 전 아침에 매일 점검하고 있으며, 75정도의 데시벨로 설정했다가 승객의 많고 적음이나 민원에 따라 조정한다”며, “승객들에게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모든 승객들을 만족시키기는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게다가 4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만큼, 오래된 차량들은 스피커 성능이 좋지 않은 실정이다. 20년 이상 된 차량의 경우, 부품이 단종되어 스피커 교체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
서울도시철도(5~8호선 운영)의 안내방송 음량조절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75데시벨로 설정한 음량 크기를 민원에 따라 승무원이 조절하고 있다. “크게 하면 크다고, 작게 하면 작다고 민원이 들어와서 어쩔 수 없이 그때마다 조절하게 된다”고 어려움을 나타냈다.
현재 지하철의 안내방송은 차가 달리는 중간에 방송을 시작하고 있어 차량 소음 때문에 듣기가 어렵다고 하는 일부 의견에 대해, “하차 안내 방송은 다음 역 도착하기 200미터 전에 방송을 시작하여 20미터 전에 끝난다”며, 승무원이 직접 하는 다른 안내방송과 겹치지 않도록 시간 배정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대되는 민원이 교차하여 발생하고 그에 따른 기계적인 대응의 악순환이 되풀이된다는 것은 사회 갈등의 원인을 방치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상대 진영을 정확히 인식만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이미 갈등이 발생한 상황으로 보아야 하며, 비록 범위나 파장이 크지 않다 하여 덮어두는 것은 민주 사회의 갈등해소 방식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음성안내의 음량에서 비롯되는 갈등의 문제는 운영 주체 측의 예산 책정 내지 정부의 지원으로 맞춤형 솔루션을 구축함으로써 물론 일정 부분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원에 영향을 받는 운영 주체 측의 고충에서 알 수 있듯이, 소리의 크기는 개인의 청력에 따른 상대적 인식영역인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어차피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음량 기준이 없다면, 소모적 논쟁에서 탈피해 제도의 본질을 살펴야 한다는 제안이 설득력을 가진다. 즉, 대중교통 음성안내의 취지를 살리는 쪽으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음량으로 인해 안전사고라도 발생한다면 그보다 더 비통한 일은 없을 것이다. 반면, 뻔히 보이는 비장애인들의 고통을 무시하는 일방통행은 더더욱 곤란하다는 이의제기도 있다.
상호배려하는 사회구성원의 자세로 제도의 취지를 살려갈 수 있도록 정부나 장애인단체를 포함한 각 사회단체, 대중교통 당사자 등 관계자들의 진정성 있는 협의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데는 이론이 없다. 눈 가리고 아웅 하듯이 대충 처리함으로써 빚어지는 비극을 이 사회가 이미 충분히 겪어왔기 때문이다.
(2016. 8. 1. 제958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