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제품 접근성, 장벽없는 세상을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딛다
최근 시각장애인 A씨는 난감한 일을 경험했다. 선물받은 옷을 세탁기에 넣고 빨았다가 줄어드는 바람에 입을 수 없던 것. 폴리에스테르 소재의 옷을 건조기능이 켜져 있는 것을 모른 채로 작동버튼을 누른 것이 화근이었다. A씨는 “만약 버튼을 눌렀을 때 어떤 기능이 설정돼 있는지 소리로 알려줬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한편 B씨는 집안일을 활동보조인에게 맡기고 집안일에는 전혀 손대지 않는다. 이유인즉 사용 방법도 모르는데 괜히 아무 버튼이나 눌렀다가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라는 것. 그는 “버튼에 점자표시가 되어있거나 하다못해 점자로 된 매뉴얼만 있었어도 생활의 질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며, “가전제품 업체들이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가전접근성포럼에 따르면, A씨와 B씨처럼 우리나라에서 가전 이용에 불편을 겪고 있는 장애인과 고령자가 약 797만 명(2010년 기준), 총 인구대비 16.4%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제품 사용의 제약이 큰 중증장애인은 약 100만 명으로, 등록장애인 252만 명 중 40%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집안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장애인이 비장애인처럼 가전제품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는커녕 화제로도 다뤄지지 않았다.
그에 반해 미국에서는 ‘재활법’에 장애인 접근성 관련 지침을 명시하여 2년마다 법령준수 여부를 모니터링 하고 있다. 또 내년부터는 휴대전화와 인터넷 TV분야에서 소외계층을 고려한 접근성 설계를 의무화할 계획이다.
일본에서도 1955년부터 정보처리기기를 중심으로 접근성 지침 및 가이드라인이 마련돼 시행 중이며, 세탁기와 냉장고, TV 등 장애인의 접근성을 향상시킨 제품들이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삼성에서 손잡이 센서를 장착하여 작은 힘에도 문이 가볍게 열리는 냉장고와 목소리로 작동시킬 수 있는 TV 및 에어컨을 내놓은 바 있다. LG에서도 최근 화면 해설 및 자막 등의 기능을 탑재한 23인치 소형 TV를 출시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몇 가지 제품에 장애인이나 노약자를 위한 기능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전부”라며,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나와 있지 않은 상태에서 접근성을 강조한 제품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즉, 가전제품 접근성 가이드라인 제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작년 6월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 ‘가전접근성에 대한 세미나’를, 뒤이어 지식경제부 산업연구원에서 ‘가전접근성 간담회’를 주최했고, 작년 12월에는 산업자원부와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에서 ‘가전접근성 포럼’을 출범해 더욱 심도 깊은 논의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가전접근성 포럼’에는 장애인단체와 전문가들, 그리고 삼성전자, LG전자, 동부대우전자, 웅진코웨이, 쿠쿠전자 등 주요 가전업체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2017년까지 20개 전자제품군에 대한 접근성 보장을 목표로 가이드라인 마련하고, 이를 법제화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또 가이드라인을 중심으로 커리큘럼을 개발해 접근성 설계 제품에 대한 인증마크를 부여하는 전문가도 양성할 계획이다.
서인환 가전접근성 포럼 교육홍보분과장은 “올해는 연구사업과 선포식을 준비하고, 내년에는 TV와 전화기를, 그 다음에는 냉장고, 세탁기, 밥솥, 휴대폰 등 6개 가전제품군에 대한 접근성 보장을 구현할 예정”이라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국내의 가전접근성 논의가 아직 걸음마 단계인 만큼 각 장애인단체와 전문가, 그리고 가전업체 등 각 주체들이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로 협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면 어떤 문제든 잘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2013.09.01 제888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