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등급제, 무엇이 최선인가?
“우리는 고기가 아니다! 고기 육질에 등급을 매기듯 장애 등급을 매기는 장애등급제를 폐지하라!”
작년 8월 21일, 180여 개의 장애인운동단체와 시민사회단체로 결성된 ‘공동행동’이 광화문 역사 안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장애등급제 폐지 등을 요구하는 그들의 농성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장애등급제가 도입된 지 25년째가 되는 지금, 어째서 이제 와 장애등급제 존속 여부에 대한 논란이 생기게 된 것일까?
장애등급제는 1989년 종래의 ‘심신장애자복지법’이 ‘장애인복지법’으로 전면 개정되고 장애인 등록을 받기 시작한 시점부터 도입됐다. 한정된 재원과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영하여 서비스를 우선적으로 필요로 하는 중증장애인을 선별하기 위한 취지였다.
그런데 2007년부터 장애등급 심사절차와 관리가 강화되기 시작했고, 이는 장애인 중 36.7%가 등급이 하향되는 결과로 돌아왔다. 이로 인해 장애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서 장애등급제의 분류 방식과 등급에 따라 혜택을 차등 지급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방안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그동안 시각장애계에서 장애등급제 폐지에 대한 논의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이는 각막이식술이나 백내장수술로 시력 변동의 가능성이 있는 경우가 아닐 때에는 장애등급 재판정 대상에서 제외돼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 말 대선 후보들이 장애인 공약으로 장애등급제 폐지 카드를 들고 나오면서, 시각장애계 내부에서도 장애등급제 폐지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일부 시각장애인들은 장애등급제 폐지가 공론화될 만큼 중요한 문제인지에 의문을 표하며, “현재 시각장애인 중 6급이 60%, 4~6급을 합치면 80%이다. 대선 후보들이 공약으로 등급제 폐지를 내세운 것은 표를 얻기 위한 것 아니냐”며 장애등급제 폐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들은 한정된 복지 예산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서비스를 차별 제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강조한다. 수혜자 선정은 최대한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의학적 기준에 따른 장애등급제가 가장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장애등급제를 폐지할 경우, 장애를 속여 부정수급하려는 사람이 생길 것이며, 그동안 중증장애인에게만 제공되던 혜택이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지금 장애등급제가 완벽하다는 것은 아니다. 제공되는 서비스가 1급에서 6급까지 세분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니, 현행 6등급 체계를 단순화시킬 필요는 있다. 그러나 장애등급제를 폐지하는 것은 안 된다”
장애등급제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지금 당장 장애등급제를 폐지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장애인 개인을 중심으로 둔 서비스 전달체계를 만들어야 하며,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와 어떤 단계를 거쳐 도입해야 할지 등을 논의할 수 있는 자리부터 만들자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들은 의학적 기준으로만 매긴 장애등급으로는 장애의 정도만 판단할 수 있을 뿐, 장애인 개개인이 필요로 하는 도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얼마만큼 필요로 하는지 판단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때문에 장애판정 이후 장애인이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복지서비스로의 연계가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장애등급제는 장애인의 필요보다는 정해진 예산이 얼마냐를 중심으로 두고, 수혜자의 범위를 얼마든지 좁히거나 넓힐 수 있는 ‘행정편의적 제도’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왜 우리나라와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장애등급제를 사용하지 않는지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며 외국의 사례를 제시한다.
미국은 장애 정도에 따라 등급을 구분하거나 등급에 따라 서비스 제공량을 정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장애인 개개인에게 어떤 서비스가 필요한지에 대해 상담하고, 그에 해당하는 서비스를 만들어서 제공하고 있다.
대만의 경우, 예전에는 장애등급제를 사용했었지만, 지금은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기능장애건강분류(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Functioning, disability and health: 이하 ICF)를 사용하고 있다. 신체적 손상을 넘어서 개인의 능력과 환경요인을 포괄하는 분류체계를 통해 장애인들의 필요에 기초한 맞춤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현행 장애등급제를 유지하되, 다른 장애분류 기준을 추가해서 수정․보완해가자는 의견도 있다.
OECD 자료에 따르면, 2012년 한국의 복지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9.3%로 OECD 평균(21.7%)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이런 상황에서 장애등급제를 없앤다고 해서 장애인 복지가 바로 좋아지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장애인에 대한 지원을 어디까지 할 것인지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후에야 예산과 인력을 충분히 지원받을 수 있으며, 그렇게 된다면 현행 장애등급제 하에서도 장애인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장애등급제를 수정하거나 폐지하는 일은 기존 장애인 복지시스템을 뒤흔들 수 있는 중요한 문제다. 대만에서는 장애등급제 폐지 후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10년 동안 수많은 연구를 거듭했으며, 충분한 논의 끝에 ICF를 받아들였다.
지금 우리는 장애등급제의 존속과 폐지라는 갈림길에 서있다. 급하게 선택할 필요는 없다. 오랜 시간을 들여 연구하고, 충분한 논의를 통해 모든 장애계의 동의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먼저다.
(2013.03.01 876호)


